라이프로그


동해시 전설과 유래 ◈ 山 과 바다

◆심동노공 묘와 일출문
동호동에 영안된 삼척 심씨 시조 심동노(沈東老)의 묘소에 얽힌 전설. 이 묘소에는 정동향 바다쪽에 향로봉이라는 조그만 산이 있다. 해변에 접한 이 봉에 육지 산쪽으로 큰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었는데 이름을 "日出門" 이라 하였다. 일명 "일월문" 이라고도 하였는데 아침 해가 뜨면 일출문 구멍을 통하여 햇빛의 촛점이 동호동 뒷산의 한 곳을 비쳤던 바, 심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빛이 비치던 장소에 안치하니 오늘날까지 명당으로 전하는 심공의 묘소이다. 그 후 진주군(眞珠君) 심동노의 시제를 매년 9월에 지냈는데 그 당시 제도에 의해 시제에 바치는 어물은 인근 어촌 어달동 대진 어민들이 마련해야 했는데, 지금부터 150년전 어느해 심공의 제일이 가까워 오는데 연일 파도가 높아 도저히 고기를 잡을 수 없어 제물을 마련하지 못한 어민들의 걱정이 태산이었다. 만약 제물을 마련하지 못하면 당시 세도가였던 심씨문중의 추상같은 문책이 덜어질 것이 분명 하였기 때문이다.그러던 어느날 두타산의 고승 연용섭이 시주를 얻고자 이 마을에 들렀다 그 말을 듣고 그날은 아무 말없이 돌아가더니 다음날 진주군 묘소에 나타나 심씨 종중이 모인 자리에서 " 이 묘는 일출문 바위 구멍에서 햇살이 비쳐오기 때문에 후손의 大盛이 어려우니 저 일출문 바위를 파괴하고 신도비도 없애는 것이 吉하다"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이말을 믿고 심씨 문중은 그리하였다 하고, 그러한 곤욕을 받지 않는다는 고승의 말에 따라 어부들이 몰래 그 바위를 깨 버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지금은 일출문 바위는 흔적도 없으며 동노공의 묘소만이 남아있다.

◆초록봉 장수바위
천곡동 초록봉에 있는 바위. 옛날에 인간세상이 너무 어지럽자 하나님은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한 장수를 보냈다. 이 장수는 세상을 바로 잡고 자기 일을 다 한 후 승천 하기 위해 힘차게 바위를 밟고 지나갔는데, 그 장수의 오른쪽 발자국은 초록봉 벼락바위에, 왼쪽 발자국은 초록봉 아래 바위에 길이 15미터, 높이 3미터의 큰 흔적으로 남아있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에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 된다 하여 일명 "칠성바위"라고도 한다.

◆여우가 변한 서구암
서구암은 북평 취병산과 서편 백월산 밑에 있는 바위. 이 바위는 "서구"라는 여우의 화신인 노파가 죽어 변하였다는 전설로 서구의 손자국 흔적이 남아있다. 서구는 천년 묵은 여우의 화신으로 신통력과 괴력으로 인근 주민들에게 심통을 부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병을 퍼뜨리는 등 괴롭혔는데 특히 어린이들에게 천연두를 퍼뜨려 죽게 하여 주민들이 이를 두려워 하여 이 곳을 지나기 꺼려 내왕이 끊어지고 소나 제물을 바치곤 하였다. 그러던 차에 이곳 출신의 소문난 효자 최진후와, 힘센 역사 김면이 합심하여 서구에 대항하여 서구머리에 쑥으로 300여군데에 뜸을 놓으니 서구는 3일간 정신을 잃고 있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때 서구가 죽어 바위로 변한 것이 서구암이다.

◆댐지실 부자
옛날 심곡리 댐지실에 김씨 부자가 살았는데, 어찌나 인색한지 시주나온 스님에게 쌀대신 마굿간 걸금을 잔뜩 퍼 주곤 하였다. 봉변을 당한 어느 스님이 집 주위를 한번 흘끔 보고 가더란다. 그후 몇일이 지났는데 그 스님이 변장을 하고 다시 와서 집뒤에 있는 묘자리가 돼지형상이라서 조상이 돼지로 되어 꿀꿀 거리겠다며 묘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주인은 조상이 돼지가 된다니 겁도 나지만 한편 그자리가 명당이라는 말을 들었던 차라 망설이다가 "묘를 파서 이상이 없으면 당신 목을 내놓으라"고 하고는 묘를 파는데, 파다 보니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일이 이쯤 되니 이장을 할 수 밖에. 사실 스님은 모욕에 대한 앙갚음으로 주인을 속인 것이었다. 그 묘자리는 김씨부자 집에서 일하던 박씨가 샀는데 그 사람은 그 자리가 명당이라는 것을 알고 아버지 묘를 이장했고, 가문이 잘 되어 자손중에 참의벼슬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 후 김씨네는 집안이 망하고 자기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노고암 (老姑岩)
망상 노봉 바닷가에 있는 노고바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옛날 임씨 성을 가진 노인이 늙으막 하게 아주 젊고 예쁜 여자를 만나 한 10년정도 깨가 쏟아지게 잘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 여자가 말하기를 " 나는 천년 묵은 구렁이요. 그래서 내일 밤 자시에 승천하게 되었으니 날 부르지 말라"며 눈물을 흘리며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노인은 같이 살던 정 때문에 그냥 보낼 수가 없어 "여보, 가지 말고 같이 삽시다" 하며 잡았다. 그때 난데 없이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면서 두 사람을 휩쓸어 갔고, 폭우가 한바탕 쓸고 간 다음에 그자리에 바위 두 개가 불쑥 솟아 났다. 정이 들었으면 그냥 살 것이지 승천하려는 욕심을 부리니 하늘이 노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 바위는 노봉바닷가에 있다.

◆천곡동 (泉谷洞) - 冷川 찬물내기
천곡은 400여년전 마양 진씨(陳氏)의 개설지(開設地)로 시 청사앞 동남편 400미터 지점에 샘물이 있는데 이물에 손발을 담그면 뼈가 시릴정도로 차서 냉천(冷川;찬물내기) 이라 하였다. 이 냉천의 이름을 따 부락이름을 "泉谷(샘실)"이라 하였다가 시 승격시 천곡 1,2,3리와 평릉 1,2리를 합쳐 "천곡동"이라 하였다. 冷泉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취병산(翠屛山) 물이 지하를 거쳐 싱그러움을 더해 천곡동으로 나온다고 한다. 비가 와도 늘지 않고, 가뭄이 들어도 줄지 않으며, 여름엔 차고, 겨울엔 따스하다. 이 물을 오랫동안 마시면 長壽한다 하여, 효성이 지극한 사람들이 부모에게 대접하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효성의 뜻을 담은 천혜의 샘터가 바로 냉천이다. 샘실마을은 매년 정월 대보름에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축제를 행하였는데, 그 장소는 냉천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특히 "우물굿 농악"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해변촌은 어디서나 식수가 귀하다. 마을사람들은 이 우물을 조물주의 축복으로 믿고 주변의 공터에는 일체 경작을 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상단, 하단으로 나뉘어 상단은 식수로 사용하고 하단은 빨래터로 사용하여, 동네 아낙네들이 드나드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던 샘터이다. 현재에는 소규모 공원을 조성하여 운동 및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어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 옛날 관찰사, 부사 등의 선정비, 공덕비, 불망비 여러개가 있으며, 3.1만세 기념비, 처녀열녀최씨를 기리는 비석등이 있다.

◆묵호동
이 고장은 옛날에는 "오이진"이라 했는데, 한일합방 이후 삼척일대에서 캔 연탄이 이곳 항구를 통해 실어나를 때 항구가 연탄가루 때문에 먹물처럼 검게 보인다 하여 "묵호진"이라 불렀고, 후에 시 승격시 묵호동으로 되었다.

◆삼화동
현 삼화(三和)는 1910년 한일합방시 "三華"를 "三和"로 개칭하였다 하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三華라 함은 "세번 빛난다"는 뜻으로 누가 제일 처음 붙인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형 지세를 보고 어느 고승이 명명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 첫번째는 일제 말기 철광산이 들어와 빛을 보았고, 두번째는 쌍용양회 동해공장으로 빛을 보았는데, 세번째는 언제 빛을 볼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일제가 三華를 三和로 개칭한 것은 대한민국의 빛을 막고 화합을 찾으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망상
옛날에는 馬上이라 했다고 전하는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한 선비가 馬上이라기 보다는, 마상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望祥이라 하였다고 한다.

◆북평
북평은 전천강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로 형성되어 있다 하여 後坪(후평) 또는 "뒷뜰"이라 하였다. 그 후 北坪이라 했는데, 시승격시 북평, 구미, 구호, 추암 등이 합하여 북평동으로 되었다.

◆송정 (松亭)
송정은 원래 "송생처(松生處; 솔난곳)"라 하였다가 그후 "송라정", "송호"라 불렀는데 이 3개 명칭을 합하여 "송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시 승격시 송정, 용정 1,2리를 합쳐 "송정동" 이라 하였다. 용정부락을 중심으로 동쪽해안에 "용추"가있고 북쪽에 "제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용이 승천하였고 안산 "구미산봉(九美山峰)"에서 용마가 태어났다고 하여 이 부락을 "용장" 또는 龍亭이라 하였다가 후에 龍井이라 하였다.

◆북삼동
시 승격시 옛 효가,지흥1,2리,동회,나안,쇄운1,2리를 합쳐 북삼동이라 하였음.
효가(孝街)는 문예가 탁월했던 김겸(金謙)이 모친의 병환에 손가락을 태워 병을 고쳤다고 하여 선조(宣祖)때 삼척부사 허목이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해 이 부락을 효가라 명명하였다.

◆부곡동
부곡 부락은 가마형태로 되어 있어 였날에는 "가마골"이라 했다. 일제때 한자로 釜谷(부곡)이라 고쳤고 시승격시 부곡 1,2,3,4리를 합쳐 '부곡동"이라 하였다. 부곡동 제1수원지 뒷마을을 "승지동(承旨洞)"이라 하였는데 이조초기 이곳에 어느 청년이 들어와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 승지원 내직으로 들어가는 벼슬을 했다하여 이 마을을 承旨골이라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병란이 일어 주민들이 피신할 곳이 없어 걱정하던중 지나가는 스님에게 물었더니 부처님을 섬기면 화를 면할것이라 하여 그대로 하여 화를 면함으로 고승의 거룩항 뜻을 받들어 이름을 승지(僧旨)라 했다고도 한다.

◆발한동
이 고장은 원래 청주 한(韓)씨가 개척했다 하여 동네 이름을 發韓(발한)이라 했는데 그 후 한씨 후손들이 마을 이름에 성(姓)을 사용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된다 하여 韓자를 翰으로 고쳐 "發翰"이라 하였다 한다.

◆마고암 - 할미바위
마고암 (麻姑岩)은 북평동 전천 하류 구호 밑 해변 기암괴석상에 고인돌 같이 얹혀져 있다. 주위 3미터 높이 2미터의 약간 타원형의 암석인데 암석반위에 얹혀져 있으면서 한사람이 밀때나 여럿이 밀때나 언제나 일정하게 흔들리는 희귀한 바위이다. 바위 모양이 할머니 모습 같아 할미바위라고 부르며, 그 옛날 할미바위는 취병산에서 동해바다를 향하여 떠내려가고 있었는데, 이때 마고할미가 이 바위에게 멈출 것을 명령하니 멈춘 곳이 전천하구이다. "할미 할미 놀아라" 하며 흔들면 할미바위는 바위 위에서 춤추듯 흔들린다. 동해시가 산업기지 배후도시 건설을 할때 기점을 바로 이 할미바위에서 잡았으며 (반경 12키로미터) 또 인근에는 소나무와 잔디가 있어 이곳을 찾는 탐방객이 많다.

◆거북바위
동해시 구미동에 있는 거북바위의 역사는 오래이다. 원래 암수 두개가 있었는데, 일제때 일본사람이 암컷은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거북의 머리가 향하는 곳은 풍년이 든다고 하여 밤중에 남몰래 머리를 돌려 놓기도 했다고 한다.

◆호암 - 호랑바위
무릉계곡에 있는 호암은 삼척부사 김효원 (1532 중종27년 - 1590년 선조23년)이 이름 지었다 한다. 어느날 이름높은 스님이 이 바위 앞을 지나다 호랑이를 만났는데, 호랑이는 스님을 물려고 덤비므로 스님은 바위를 건너 뛰었는데 뒤쫓던 호랑이는 바위를 뛰어넘지 못하고 계곡에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三一萬歲記念碑
송정동에 있었지만, 지금은 냉천 옆으로 옮겨져 있다. 1919년 4월 17일 오후 2시 송정보통학교 학생 50여명과 주하영,김진수,홍학현 등이 주동이 되었던 3.1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동해문화원 주관으로 1990년 9월 30일 건립. 당시 만세운동은 송정보통학교 교정에서 열렸는데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전해진다.


◆봉정연지
이원동 단봉에 위치한 연못. 1819년 순조19년에 진사 김종의가 아름다운 정자를 연지 중앙섬에 건축하고 정원 앞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고 양어장을 겸하였다. 연당 주위가 200미터이고 홍연, 백연이 활짝 피었을때는 그 화려함과 잉어, 붕어 등 물고기들이 뛰놀고 있는 모습은 일대 절경이었다고 한다.

◆ 무릉계곡 - 국민관광지 제1호 (1977년 지정)
일명 "무릉도원"이라 하며,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되었고 예로부터 시인,선비, 고승 들이 찾아 흠미하던 경승지이다. 고려 충렬왕때 이승휴가 이름을 지었다는 설과, 조선 선조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작명하였다는 두가지 전설이 있음. 무릉반석에 새겨진 기념명자의 석각은 선조들의 풍류를 보는 듯 한데 특히 1571년, 조선 선조 4대 명필중의 한 분 양봉래가 남긴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12자, 그리고 下行傍書로 남겨져 있는 "辛美仲春 玉호居士書"등의 석각이 유명하다.

◆금란정 (金蘭亭)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 한일합방으로 국치를 당하여 향교가 폐강되자 이를 분개한 뜻있는 유생들이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어 울분을 달래며 정각을 세우려 하였으나 일본 관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함. 1945년 해방이되자 후손들이 선인의 뜻을 받들어 처음 이원동 단봉에 건립 하였다가 1956년 이곳 무릉계곡으로 이전함. 매년 춘추 계원들이 모여 시회동을 개최하고 있음.

◆삼화사 (三和寺)
삼화동 산172번지 - 무릉계곡,두타산 기슭에 있음. 영동남부의 가장 중심적인 사찰 (0394-534-8313). 조계종.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 신라 "자장율사"가 "흑연대"를 창건한 것이 시초라는 설도 있으나 신빙성이 약함.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말 "범일국사"가 "삼공암"을 창건한 것을 고려 태조때 "삼화사"로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1905년경 삼척지방 의병의 거점으로 이용되던중 1906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왜군의 방화에 의해 대웅전, 선당 등 200여칸의 건물이 전소. 1908년 대웅전, 요사체, 칠성당 등을 다시 건립하였고, 1977년 부지가 개발지역에 편입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옛 터는 지금 주차요금 티켓 배부하는 곳 가기 조금전 오른 쪽이라 함. "대웅전"에 "철불 (비로자나불 - 지혜를 주심)"을 모셨고, 우측 "삼성각"에는 토속신앙으로 산신령, 신선 등을 모시고 있으며, 좌측 "약사전"에는 "약사천불 (약사여래 - 마음과 몸의 병을 관장하심)"을 모시고 있는데 원래 작은 부처님 천(千)분을 모셔야 하나 장소 등의 문제로 현재는 500분만 모시고 있음 (신도 한명당 30만원을 시주하고 한분씩 모신 것). 대웅전 왼편 마당에 모셔진 큰 부처님은 "지장보살님 ( 중생들을 구원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이 나의 성불이라고 하신 분 )"이시다. 후문쪽에 모셔진 역사들은 원래 지장보살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지장보살옆에 있어야 하나 자리가 협소하여 그 쪽으로 모셔둔 것. 삼화사 앞에는 큰 느티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1000년이 넘은 이 느티나무는 무릉계곡에서 제일가는 古木이다.

◆삼화사 철불 (鐵佛)
동해시 삼화동 삼화사. <三和寺史記>에 의하면 신라 34대 효성왕 3년에 서역으로부터 약사여래 3불이 석주 일편을 타고 바다를 건너 본국 동역으로 진입하여 이곳 두타산에 들어왔는데, 3불은 백(伯) 중(仲) 계(季)를 합쳐 부르는 명칭으로, 백(伯)은 손에 검은 연꽃을 들고 중(仲)은 손에 푸른 연꽃을 계(季)는 손에 금연화를 들었으며, 백(伯)은 현재 삼화사(三和寺)에 머물고 중(仲)은 이원동 "지향사"에 계(季)는 삼척 "영은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백(伯)인 철불은 삼화사 좌불암에 안치되어 있다.

◆용 암 (龍岩)
구 삼화사 앞에 있는 바위. 위 철불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삼불을 태우고 온 용은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도 용암 윗면에 삼불이 앉았던 자국이 완연히 남아있다.

◆두타산성 (頭陀山城)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미로면 고천리, 하장면 번천리 사이에 자리잡은 두타산의 북쪽 중턱에 위치해 있음.[세종실록지리지]에는 "두타산석성은 府의 북쪽에 있다. 둘레가 1518步 이며 세골짜기의 물이 흘러 하나의 내를 이루었는데 사철 마르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타산성은 石築이며,둘레 8607尺, 높이 5尺"이라는 기록이 있음. 태종 14년(1414년) 부사 김맹균이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조선 태조의 5대조 李安社가 몽고 침략때 두타산성에서 피신했다는 기록(조선실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축성의 시기는 조선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임. 고려 충렬왕때 이승휴(李承休)가 파직된 후 이곳에 은거 하면서 자신을 "동안거사(動安居士)라 칭하고, "帝王韻記(제왕운기)"를 집필했다고 한다. 후에 남하중이던 왜구의 주력부대와의 전투에서 3일간의 격전끝에 비밀통로가 누설되어 함락 당하여 성안의 주민들이 죽임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여지도서"에 남아 있음. 성의 규모 는 둘레 4175M의 타원형으로, 다른 일반 성과 달리, 지혜를 발휘하여 지형지물을 활용한 천연의 요새라는데 그 의의가 크다. 현재는 부분적인 석축만 남아 있다.

◆임진왜란과 전천 (箭川)
이 하천을 박곡천, 북평천, 살천 이라고도 하는데 청옥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과 백복령에서 흐르는 물이 삼화동 연못에서 합쳐 북평평야를 가로지르고 동해로 뻗어 흐르는 하천이다.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시 왜적에 의하여 두타산성이 함락될때 교전이 심하여 전사자의 유혈이 하천을 붉게 하였으며 화살이 물에 떠서 강에 가득차 흐르므로 이때부터 이 하천을 "전천"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

◆까막바위
묵호항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300미터 지점에 높이 10미터에 유난히 검은빛을 띠고 깍아 세운듯 해변에 우람한 모습을 나타내고 서있는 바위. 지금의 묵호동이 망상현에 속해 있던 이조중엽, 인품이 온후하고 덕망있는 의로운 호장(戶長;지금의 통.리장)이 살고 있었다. 그는 춘궁기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눠 줬으며 걸인들에게도 후한 대접을 해 존경을 받는 호장이었다. 그당시 가끔 왜구가 쳐들어와 양민을 괴롭혀왔는데 어느날 두척의 배를 끌고 대부대의 왜적이 이 마을에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농락하고 주민을 학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때도 호장은 왜적에게 호통을 치며 싸웠으나 역부족이었고 왜구들은 약탈한 재물과 호장을 싣고 떠나려 하자 마을 전주민들이 삽,곡괭이,괭이,막대기등을 들고 그 어진 호장을 못데려간다고 싸웠으나 무참히 죽어 가기만 하였다. 분노에 떨던 호장은 왜장에게 크게 노하여 하는 말이, " 비록 내가 너희들에게 육신은 죽어도 너희들을 다시는 이곳에 침범치 못하게 하리라 !"라고 꾸짖자 맑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천둥 번개가 치고 파도가 밀어 닥쳐 호장이 탄 배가 뒤집혀 모두 죽었다. 이때 남은 왜구의 배한척은 달아나던 중 거대한 문어가 나타나 배를 내리쳐 배는 산산조각나고 왜구는 모두 죽었다. 다음순간 하늘이 맑게 개고 파도가 잔잔해지자 한떼의 까마귀떼가 몰려들어 왜구들의 시체를 뜯어 먹었다. 그때 나타난 큰 문어는 호장이 죽어 변신한 혼 이라고 말하며 그로부터 이 마을에 왜구의 침입이 끊기고 이 까막바위 밑에 큰 굴이 두개 있는데 여기에 그 호장의 영혼이 살고 있다 하여 해녀들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 죄지은 사람이 까막바위 밑을 지나면 문어에게 잡혀 죽었다고 전해지며, 이곳 주민들은 이 지역에서 매년 풍어제를 지내며 지금도 수호신으로 받들고 있다.

◆입석 (立石)
동해시 부곡동 승지골. 2미터 화강암. 삼국시대 신라의 "실직"과 고구려의 "하슬라"의 경계 지주. 고구려와 신라 양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임.이 곳에서 군용 가마솥 모양의 토기와 화살촉등 출토.

*古代 격전지 마상천 (馬上川)
망상동 넓은 들판에 농업용수로 쓴 조그마한 하천이 있는데 이를 "마상천"이라 한다. 이 지역은 고구려 "하슬라"에 속해있던 지역으로 신라 "실직"과 접경지로서 자주 접전이 벌어지던 곳이다. 주위에 군사들이 진을 쳤던 곳, 병마 훈련장, 말 기른 곳, 말 달리기 연습장 등의 흔적들이 많다. 그 당시 이 하천에 말이 쉴 새 없이 드나들어 항시 말이 하천에 서있다고 해서 마상천이라 불러 오늘에 아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사문동
시 승격시 발한 3,11,12리를 합쳐 士文洞이라 하였음. 특히 망상과 발한을 넘나드는 조그마한 고개마루턱이 있는데 이곳을 "士文재"라 한다. 일설레 의하면 신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심할때 병란을 피해 이 고개를 넘어오다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여 "死門재"라 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삼국이 통일되고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경주에서 강릉방면으로 가던 김유신장군이 이 고개의 유래를 주민들로부터 듣고 사문재에 올라 고인들의 명복을 빈 다음 고개 이름을 "士文재"라고 고쳤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이조 숙종때 심곡에서 약천 남구만선생이 학문을 연구할때 약천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삼척,북평,발한 등지에서 많은 선비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하여 이 마을을 "士文재"라 했다고도 한다.

◆藥泉 남구만 시조비
동해고속도로 "동해휴게소(망상)"에 있음. 남구만(1629-1711)은 조선 숙종때 사람으로 학문과 정계의 거봉이었다. 당시 소론의 영수였던 그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1689년 망상동 심곡마을에 유배되어 2년정도 있던 기간중에 전원의 목가적 정서를 수없이 시로 읊었다. 그 중에서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니렀느냐 저너머 사래 긴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는 대표적인 시조이다. 그는 1960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올라갔다. 그의 사후에 심곡에는 "藥泉祠"를 세워 제사지냈는데 후일 "魯谷書院"으로 이어졌고, 1855년 강릉 신석동으로 이전하여 "申石書院"이라 하였다.

◆지석묘 (支石墓)
동해시 부곡동 55-2.약 2000년전 청동기시대. 장방형으로 판석을 세운 위에 개석을 덮음. 마제석검, 석촉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은 2000년전 부족사회가 형성되어 농사와 어로생활을 하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감추사 (甘湫寺)
북평-묵호간 해안도로 중간에 위치한 아늑한 해변이 감추이다. 이곳 백사장 언덕에 정자(옥석정)가 있고, 바위 언덕 위에 감추사가 있다. 용정동 산 12-1번지 - 일명 "石室庵(석실암)"이라 함. [유래] 신라 진성여왕 10년(896년), 세째 딸 "善花公主(선화공주)"가 "白風病(백풍병)"에 걸려 이를 고치기위해 용화산에 있는 절을 찾아 "지명법사"의 선법을 듣고 , 현 동해 감추에 있는 석굴을 찾아 불상을 모셔두고 기도를 하여 완치되었다. 이 은덕을 기리기 위해 여기에 절을 지어 "석실암"이라 칭하고, 선화공주는 노후에 용왕에 대한 보은의 심정으로 동해를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였으며,그 묘가 감추에 있다고 전해진다. 감추사는 1959년 해일에 의해 유실되고, 1965년경 "甘雲法師(감운법사)"가 와서, 洛山絶景이 바다와 인접해 있는 天然藥水는 水中之水라 하여 "甘露水"라 이름 짓고 사찰을 중건하여 그 이름을 감추사 (甘湫寺)라 하였다. 지금은 선화공주의 유적은 찾아볼수 없고, 다만 석굴의 흔적만이 있음. 지금도 절앞의 샘물은 생명수라 하여 물 길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향사 (池香寺)
동해시 이원동에 있음. 자장율사가 창건한 청연대 옛터에 신라 경덕왕 17년 (758년)에 창건하였으나, 언제 폐사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약사철불이 비 바람을 맞으며 방치되어 있는 것을 1908년 인근주민 최상완의 처 崔氏가 불사 한칸을 지어 불상을 모시고 "지향사"라 하였다. 이 약사철불은 신라 34대 효성왕 3년 서역으로부터 "약사여래三弗"이 본국동역으로 해서 두타산에 당도 하였는데 그 중 仲弗이 지향사에 머물렀다 한다.

◆孝烈閣 29개소
동해시 일원에 29개소의 효자각,열녀각,비등이 있는데 송정동에 있는 "처녀열녀최씨지비" 는 전주최씨 최연기의 딸을 기리는 비석이다. 그녀는 임진왜란 당시 약혼을 한 몸이었는데, 왜구를 피해 산으로 숨었으나 발각되었고 항거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바쳐 순결을 지킨 그녀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쇄운동에 있는 "양세삼효려각"은 정충원과 두 아들 규형,두형을 기리기 위함이다. 정충원은 병석에 계신 부친께 잉어를 잡아 드리려고 겨울에 강에 나갔으나 잡지못해 애태우던 중 얼음이 갈라지면서 잉어 한 쌍이 올라와 잡을 수 있었다 하고, 그의 두 아들은 부친이 돌아가시자 죽으로 연명하며 3년 시묘살이를 하였고, 후에 모친이 위독하자 규형은 7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을 절단하여 모친께 피를 드려 연명하시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옴.

◆봉화대
동해시 어달동 3/5. 고려 의종(1149)때 세움.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로 위급을 알렸음. 평화 1회, 적발견 2회, 적이 국경 가까이 오면 3회, 적이 국경 침입 4회, 접전 5회로 신호 함. 현재 붕괴된 잡석의 흔적만 있음.

◆괴란리 승담폭포 뒤 - 형제봉
옛날 괴란리에 우애도 좋고 효성도 지극한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나라에 난리가 나자 자진해서 전쟁터로 나갔다가 모두 죽었다. 그들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이 마을에 전해 진 다음에 마을 뒷산에 두 봉우리가 불룩 솟아 올랐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형제의 넋이 부모를 걱정 하여 봉우리로 생겨난것이라 하고 형제봉이라 불렀다.

◆망상 - 고부석 (姑婦石)
옛날 망상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빨래를 하고있었는데, 날씨가 하도 더워 시어머니가 목욕을 하려고 물에 들어갔다가 그만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가게 되었다. 이를 본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그만 둘 다 목숨을 잃게되었다. 그후 냇가 양쪽 돌들이 벌겋게 얼 룩이 지더니 밤에 비만 오면 그 부근에서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전해진다.

◆강감찬과 개미
지금 망상학교 앞 철길 옆에 들축나무골이 있는데, 그 곳은 들축나무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고려때 강감찬 장군이 강릉부사로 있다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그 들축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개미들이 자꾸 덤벼들어 귀찮게 하였다. 장군은 쥐고 있던 지팡이로 금을 쭉 그었대. 그랬더니 개미들이 전혀 달려들지 않았고, 지금도 그 금이 그어져 있던 자리에는 사람이 누워 자도 개미들이 달려들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강감찬과 모기
옛날 강감찬 장군이 강릉부사로 있다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뒷뜨루(현 북평동)에 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모기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아무리 뒤척거려도 잠을 잘 수 없자 장군은 종이에다 방을 써서 창밖으로 뿌렸다. 그러자 모기들이 울지도 물지도 않아 잠을 편히 잘 수 있었고 지금도 뒷뜨루에있는 모기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한다.

◆아기장수 이야기
아기장수가 태어났던 집터는 지금은 토지정리를 해서 없어졌지만 쌍용양회 부근이라고 전해진다. 그곳에 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배선남"이라는 애를 낳고 태를 자르 려고 하니 애가 안보이는 것이었다. 놀라서 남편을 부르고 관솔불을 훤하게 하고 찾아보니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실공(시렁)위에 냉큼 올라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는 장수가 나면 역적이라 해서 죽이고 3대를 멸하는 시대라 부부는 이를 염려하여 맷돌로 아기를 쳐 죽였다. 그러자 근처 굴에서 용마가 나 세번 울고 사라졌다고 한다. 근 300년전 이야기 이지만 용마가 난 곳은 도경역 근처에 있는 굴이라고 전해진다. 그 일이 있고 난뒤 그 집안에는 벙어리가 속출 하는 등 거의 다 부실하였다고 한다.

◆의승 혜연 (慧衍)
본명은 "태영"이라 하며 혈암리에 살았다. 당시 쇄운리(북삼동) 최세필이 훈도하는 서당에 다니던 중 항상 일찍 오던 그가 매일 지각을 하자 이를 수상히 여긴 훈장이 연유를 묻자, " 아침에 서당에 오는 길에 이도리(이원동)에 이르면 송림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와 구슬을 내입에 물렸다가 다시 자기 입에 넣었다 하며 장난을 걸어 늦었다" 고 하였다. 이에 훈장이 "내일도 그러거든 혀를 꽉 물어라. 그러면 괴변이 생길 것인즉 놀라지 마라" 고 일러 주었다. 다음날 그리하였더니 그 여인이 요괴로운 짐승으로 변하여 죽었다 하며, 그 후 태영은 풍수지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1701년 4월 10일 삼척 향교의 터를 구터에서 몇자 낮추어 짓게 하였고, 출가하여 관의 "의승대장" 겸 "팔도도총섭" 까지 지냈으며 풍수지리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나라에도 충성을 다한 의승으로 전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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